내 번호를 알고 있는 인물은 몇 되지 않는다.
내가 알리고자 하지 않았고, 알려고 든 사람도 없었다.
덕분에 나는 벨이 울리면 추리를 시작한다.
순위를 매기고 가능성을 짚는다.
'델렐레',
'조군 사십오프로, 모르는 사람 삼십프로, 어머니 십오프로..',
'삑'.
한동안 일순위를 맞춰왔던 것인데 이번엔 용케 틀렸다.
착신을 누르자 멀리서 흐릿한 소리가 들린다.
어딘가 폐렴이랬다.
아무 생각이 없다.
기계를 끄고 나는 잠깐 산책을 가기로 하여 코트를 등에 멘다.
미지근한 바람이 분다.
덜 익은 사람들의 얼굴이 지난다.
동그란 골목을 몇분인가 걷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진다.
아무 생각이 없다.
이 사람의 얼굴엔 반성도 화해도 아무것도 없다.
보물을 찾은 유치원생의 천진난만함이 내 손에 쥔 계약서의 가치를 불사른다.
이런걸 보려고 왼팔의 초상화를 떠올린게 아니야..
그리그리 넘어온 피가지처럼 나도 아무 얼굴이 아니다.
아무 생각이 없다.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에
어쩔 수 없다는 내 두손은 비련할 틈이 없다.
일기를 쓰듯 이를 닦고 자리에 든다.
한동안 머리맡에서 쫓겨난 베개가 다가와 유혹한다.
이제 베개를 안을 수 있어.
아무 생각이 없다.
집어든 과도가 약간인가 피를 맛보았지만
이건 머저리 삼류 연기자의 몸짓이다.
늑골 어디하나를 만나지도 못한 그걸 떨어뜨린다.
'분명 이 순간을 후회하겠지.'
나는 크로노맨서chronomancer였다.
꽤 오랫동안 참았던 미소가 나도 모르게 나를 찢고 나올 뻔 한다.
매번 실패하던 나였으나
이것 한가지는 만들 수 있나 싶었다.
슬프지 않을 수 있다면 기쁘지 않아도 괜찮아..
눈물샘을 파낼 수는 없었지만 그림을 끄고 음악을 흘렸어.
이제 막 한 걸음 내딛었을 뿐이야.
돌아오는 길에 버려진 플라스틱 물병을 보았는데
아직 안에 들어있던 물은 색을 얻어 있었다.
섬찟함을 입술에 굴리며 돌아와 냉장고를 열었는데
한동안 입맞추지 못한 물병이 기다리고 있었다.
쓰다.
물병을 기울여 내용물을 버리고
나는 푸르스름한 물을 상기한다.
쓰겠지.
속이 빈 물병이 나를 본다.
형형색색의 분노가 겨울을 닮아가고 있는 나를.
인간의 몇프로는 물이라고 했던 것 같아.
물병의 영혼은 생각하겠지.
쓰겠지.
# by 크리 | 2008/12/14 23:59 |
영혼 |
트랙백 |
덧글(1)